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서로마 고토 수복 전쟁 (문단 편집) ==== 토틸라의 승리 (~ 550년) ==== 새해를 로마시에서 지낸 토틸라는 아풀리아[* 이탈리아의 장화 굽에 해당하는 동남쪽의 좁은 반도 지역. [[브린다시]]와 [[오트란토]], [[바리(이탈리아)|바리]] 등의 도시가 있다.]의 동로마 군대마저 일소하기 위해 그 길목의 나폴리로 향하였는데, 벨리사리우스는 틈을 타 로마시로 진격하였고 547년 2월, 1천 명의 기병과 함께 로마를 습격하여 탈환하였다. 토틸라는 25일 만에 회군하여 재포위를 시도하게 되는데, 벨리사리우스는 3주라는 짧은 시간 내에 성벽의 파괴된 부분을 대충 고쳐 놓았다. 프로코피우스에 의하면 성벽의 잔해를 '순서에 상관없이' 막무가내로 쌓아 올렸다고 전해지며, 그 외에 벨리사리우스는 성문마다 장창병을 배치하였고, 성 밖에는 곳곳에 마름쇠를 뿌려 대비하였다. 547년 3월, 토틸라는 재차 공격하였으나 짧은 기간내에 상당한 준비를 해놓은 수비군에게 격퇴되었다. 비록 동로마군이 승리를 거두긴 하였지만, 뿌려놓은 마름쇠 때문에 바로 추격을 못하였고 토틸라는 동로마 측의 주요 거점이었던 페루자를 함락하였다. 이후, 폐허가 된 로마시를 보고 받은 충격을 잊을 새도 없이 유스티니아누스의 칙령을 받은 벨리사리우스는 루카니아[* 현재 이탈리아의 타란토 일대. 타란토 만의 중앙부이다. 동쪽의 아풀리아와 서쪽의 칼라브리아 지방과 접한다.]로 이동, 크로토나에 주둔하였는데 토틸라에게 급습을 당했다. 근처의 구릉을 지키던 병사들은 고트족을 보고 도주해 버렸고, 벨리사리우스는 메시나 해협을 건너 시칠리아까지 퇴각하였다. 이후 벨리사리우스는 루카니아 회복에 나서 로시노를 두차례 공격하였지만, 첫 번째 시도는 폭풍으로, 두 번째 시도는 토틸라가 파견한 지원군에 의해 실패하였다. 지원이 절실하다고 느낀 벨리사리우스는 황후 테오도라와 친분이 있는 자신의 아내 안토니나를 콘스탄티노플로 보내어 지원을 호소하게 하였는데, 그녀는 별 소득없이 돌아왔다. 그 이유는 즉슨, 테오도라가 암으로 사망하였던 것이다.(548년) 실의에 빠진 황제는 그 누구도 접견하기를 거부하였다. 따라서 안토니나는 남편 벨리사리우스의 수도 귀환을 요구하는 탄원서만 남긴 채 시칠리아로 돌아온 것이다. 그녀는 이탈리아 원정이 설사 실패로 귀결된다 하여도 남편 잘못이 아니라 여겼기 때문이다. 시칠리아의 벨리사리우스는 별다른 활동을 하지 않다가 549년 가을에 콘스탄티노플로 소환당하여 은퇴를 선고받았다.[* 본인이 먼저 사직서를 냈다고도 한다. 분명 2차 이탈리아 출정은 앞서 그가 이룩한 명성과 영광에 비하면 보잘 것 없는 원정이었지만 그 의의는 컸다. 벨리사리우스였기에 그렇게나 열악한 상황에서도 그 정도 할 수 있었고 결국 이것은 한줄기 희망의 씨앗을 남기게 되어 이후 나르세스가 이끄는 군대에게 토틸라는 패사하고 이탈리아는 제국의 품으로 돌아오게 된 것이다. 벨리사리우스 개인에게도 제2차 이탈리아 원정은 자신의 전술, 전략적인 면모를 완성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다만 벨리사리우스와 유스티니아누스는 사적 자리에서는 매우 절친한 사이였다. 벨리사리우스는 자신을 중용해 준 황제에게 변함없는 충성을 바쳤고, 유스티니아누스는 금을 입힌 벨리사리우스의 조각상을 세워주었다. 동상 개막식을 참관한 벨리사리우스는 남다른 감회를 품은 채로 자신의 궁전에 들어갔다.] 그렇게 벨리사리우스가 이탈리아를 떠나자, 이를 기회라 여긴 토틸라는 세 번째로 로마시를 포위 공격하였다. 동고트 군대의 격한 공격에도 도시의 3천 수비대가 버텨내자, 토틸라는 병사들을 아끼기 위해 또 다시 로마를 말려 죽이려 하였다. 사령관 디오게네스는 장기간의 포위에 대비하여 미리 라티움 지역의 밀을 수확, 식량을 비축해 놓았다. 하지만, 포위가 길어지며 전쟁에 진절머리가 난 일부 병사들이 고트 진영과 내통하였고 푸짐한 보상에 눈이 멀어 밤중에 성문을 열어버렸다. 토틸라의 군대는 들이닥쳐 전혀 예상을 못하고 있던 동로마군을 살육하였고, 남아있던 대부분의 귀족층 시민들과 병사들은 혼비백산하여 도주하였다. 로마시는 다시 한번 대대적으로 약탈되었고 남자들은 학살되었는데, 엄명으로 아녀자에 대한 살육은 금지되었다. 토틸라는 기병대를 보내어 도로변에 매복을 시켜 그들을 체포하게 하였다. 가도를 따라 도주하던 병사, 시민들의 대부분이 생포되었고 장군 디오게네스와 소수의 병사들만이 달아나는 데에 성공하였다.(550년 1월 16일) 토틸라는 원래 로마시를 파괴하여 지도상에서 지워버리려 하였으나, 이후 마음을 바꾸어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야욕으로부터 보호하기로 하였다. 잡혀온 사람들과 동고트 인들이 로마에 재정착 되었고, 일부 건물들이 재건되었다. 이후에는 다시 전차 경기가 열리는 등, 로마시는 토틸라의 치하에서 잠시나마 평화를 찾았다. 토틸라가 로마를 재접수하자, 이탈리아 원정이 실패로 귀결될까 위협을 느낀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벨리사리우스에 이어 이탈리아 사령관으로 낙점한 자신의 조카 게르마누스에게 [[세르디카]]에서 장병들을 모집하고 훈련시키게 하였다. 프로코피우스에 의하면 게르마누스의 명성에 로마인들 뿐만 아니라 야만족들도 징병장에 몰려들었고, 같은 해에 테살로니카를 공격하기 위해 남하하던 슬라브 인들도 그의 임관 소식을 듣고 달마티아 방면으로 진로를 바꿀 정도였다고 한다. 게르마누스는 동고트 족과의 전쟁에서 그들의 호의와 명분을 얻기 위해 테오도리크의 손녀이자 비티게스[* 라벤나 함락 이후 콘스탄티노플에서 귀족 작위를 받고 은퇴생활을 하던 중 540년 즈음에 사망하였다.]의 과부인 마타순타와 결혼하였다.[* 이 결혼은 그의 삼촌인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주관하에 치러졌으며 게르마누스는 동고트와 동로마 모두의 계승자로서 인식되었다.] 이에 일부 고트 귀족들과 고트 진영으로 넘어간 현지 로마인들이 그에게 사절을 보내어 그가 이탈리아에 온다면 동로마 진영에 가담할 것을 제안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550년 9월, 출정 이틀 전에 갑자기 병으로 쓰러졌고, 그대로 급사하여 원정은 취소되었다. 그의 후임으로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오랜 고심 끝에 이탈리아 출신의 문관 리베리우스[* 동로마 측으로의 귀순 이후 538 ~ 542년간 이집트 총독을 역임하며 단성론자를 억누르고 콘스탄티노플로 귀환하였고 원로원 의원이 되었다.]를 지휘관으로 임명하여 동고트 측에게 포위된 [[시라쿠사]]로 파견하였는데, 전쟁 경험이 전무한 고령의 문관이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었다. 그의 군대는 시라쿠사 구원에 실패하였고, 리베리우스는 [[팔레르모]]로 간 후 수도로 복귀하였다.(551년) 550년 말, 리베리우스의 실패에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아르메니아 인 아르타바네스 지휘하의 군대를 파견하려 하였으나 이오니아 해의 폭풍으로 지연되었다. 551년, 시칠리아에 도달한 그는 리베리우스의 후임으로서 지휘권을 인수하였고 토틸라가 시라쿠사에 남긴 동고트 수비대를 항복시켰다. 하지만 그뿐이었고, 프로코피우스에 의하면 고트족에 포위된 아풀리아의 도시 크로토네의 시민들의 구원 요청에도 움직이지 않았다. 이후로도 시칠리아에만 머물던 아르타바네스는 553년에 나르세스가 호출한 후에야 이탈리아 본토로 움직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